[오늘의 시]

1945, 그리운 바타비아 / 채인숙

1

화란의 여자들이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채 하얀 자전거를 타고 파타힐라 광장을 빠져나간다 항구 바깥에는 별의 방향을 따라 바다를 향해하는 목선들이 긴 열을 이루며 잠에 들었다

 

2.

어둠의 극장에는 일찍 늙어버린 배우들이 모여 도망자들을 위한 연극을 만든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복동의 식민지에서 왔다던 청년의 이야기를 한다 어린 아내를 두고 온 그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을 생각하느라 밤새 울었다고 그러다 잠자리를 밀고당한 것이라고 수용소를 탈출한 그를 찾아 병사들이 그림자극을 공연하던 와양 극장을 덮쳤다고 그건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고 청년은 화란인의 빨래를 다려주는 여인의 사랑을 거절했다고

 

3.

광장 모퉁이에서 사산도를 연주하던 노인은 중세의 문양들이 어지럽게 그려진 천막으로 들어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옛 애인의 이름을 문신으로 남겼다 손목에 새겨진 검은 먹선의 그녀와 이별 수를 점쳐준 점술사를 위하여 너는 국수를 삶았다 발목에 쇠뭉치를 매단 채 키보다 낮은 천장 아래서 서럽게 입을 맞추던 노인의 사랑은 한때 와양 극장의 아름다운 대본이었으나 무수히 실패한 사랑의 대사들만 젖은 면발이 되어 목구멍을 타고 넘었다

 

4.

사랑을 잃은 날마다 밤은 더 깊어지고 자정이면 어김없이 배가 고팠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바타비아의 밤은 느리게 걸어왔다가 황급히 광장을 덮쳤다 그림자극의 마지막 대사가 끝나면 배우들은 식은 국수를 먹으러 천막으로 들었고 너는 밤새 다림질할 빨래 바구니를 받으러 광장을 나섰다 누구도 사라진 그이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습기의 무게를 견디느라 밤이 저지르는 어떤 더러운 사랑에도 눈을 감았다

 

5.

당신을 위해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는, 밤은 쓸쓸하다

 

* 바타비아 : 자카르타의 옛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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